Lancelot Capability Brown (1715-1783), 영국 조경가 1715년 8월 30일, 영국 노섬버랜드 커크할 출생, 1783년 2월 6일 런던에서 사망.
랜셀롯 브라운, 일명 ‘캐퍼빌리티’ 브라운 Lancelot ‘Capability’ Brown은 영국 풍경화식 정원이 나은 최고의 조경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캐퍼빌리티라는 별명은 브라운이 장원주들에게 그들의 땅이 좋은 풍경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늘 역설했기 때문에 붙여졌다. 그는 윌리엄 캔트William Kent (1685-1748)의 뒤를 이어 풍경 정원을 발전시켰으나, 풍경이 아닌 자연을 창조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풍경과 자연이라는 개념이 분리되어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가 창조한 ‘자연’은 늘 한결 같았으며 차분하고 목가적이었다.
브라운은 1750년경부터 삼십 년간 시장을 독점했다. 약 170여개의 작품을 완성하여 영국 중남부의 자연을 브라운 식으로 변화시켰다는 평을 듣고 있다. 넓은 초원, 계류를 막아서 조성한 대형 호수, 장원의 주변을 두르는 띠 형의 숲, 덩어리로 심는 나무 등이 그의 특징이었다. 사실상 영국의 중요한 장원과 파크는 거의 모두 그의 손을 거쳐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사후에 천편일률적이고 지루하고 텅 비어있다는 이유로 브라운은 쉽게 잊힌다. 20세기에 들어 와 그의 풍경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명성을 되찾게 된다.
1. 노섬버랜드 : 정원사 수업 ( 1739 까지)
랜셀롯 브라운은 노섬버랜드 주의 커크할Kirkharle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커크할은 윌리엄 로레인William Loraine (1658-1744)경이 다스렸다. 로레인 경은 정원애호가였고 건축, 정원과 식물재배에 전문가적 안목과 실력을 갖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694~1738 사이에 자신의 장원에 이만 그루 정도의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고, 기타 지역에 팔만 팔천 주의 나무를 추가적으로 심었다. 또한 수백 그루의 유실수를 심어 재배했으며 과수원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랜 셀롯 브라운은 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이 로레인 경의 장원, 커크할 홀Kirkharle Hall에서 일을 시작했다. 로레인 경이 숲을 조성하고, 나무를 배치하고 재배, 관리하는 작업을 도왔으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원사교육을 받게 되었다. 1739년 연로한 로레인 경은 추천서를 써 주면서 랜셀롯 브라운을 남부 지방에 사는 친척들에게 보냈다. 로레인 경이 이렇게 랜셀롯 브라운을 각별하게 대한 이유에 대해서 실은 랜셀롯이 로레인 경의 서자였기 때문이라고 설이 있다. [Hinde, Thomas 1986, p.12]
랜셀롯 브라운은 나중에 50대가 되어 다시 커크할에 돌아 와 장원을 풍경식으로 조성하게 된다. 1902년도에 그려진 아래의 그림에서 랜셀롯 브라운 특유의 정원풍경을 알아볼 수 있다.
로레인 경의 추천장을 손에 쥐고 남쪽 버킹엄셔로 내려간 브라운은 로레인 경의 친척들의 주선으로 일자리를 얻었다. 1986년에 브라운 전기를 출간한 토머스 하인드는 브라운이 처음에 키딩턴Kiddington Hall에서 일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키딩턴 홀은 지금도 브라운식 풍경이 보존되어 있다.) 브라운은 이 무렵 로레인 가문과 친분이 있는 리처드 그랜빌Richard Grenville의 워튼 하우스Wotton House에서도 일하게 된다. 리처드 그랜빌은 스토우의 주인 콥햄 경Richard Temple, 1. Viscount Cobham의 조카이기도 했다. 이 즈음 콥햄경의 스토우 정원은 이미 명소로 소문이 났었다. 마침 정원사 자리가 공석이 되어 콥햄 경이 정원사를 찾고 있었고 브라운을 추천받아 고용했다.
1741년 콥햄경 비서의 장부에 “새 정원사 임금을 지급함” 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새 정원사는 물론 랜셀롯 브라운이었고 풍경화식 정원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스토우 정원에서의 시작은 그에게 도약의 발판이었다.
2. 스토우 정원: 경력을 쌓다 (1741 ~1751 )
스 토우에서 근 십년 가까이 일하는 동안 브라운은 조경가로서의 실력을 확실히 구축했을 뿐 아니라 독학으로 건축 공부도 했다. 여기서 그는 윌리엄 캔트의 방식을 익혔을 뿐 아니라 이를 발전시켜 자신만의 독창적인 개념을 만들어 나간다. 윌리엄 캔트는 스토우 정원에 풍경화식을 처음으로 도입했으나 당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주로 왕실 건축가, 조경가, 디자이너로 일했고 콥햄 경과의 고용관계는 없었다. 랜셀롯 브라운의 경우는 이와 달리 정식 정원사로 고용되어 스토우에 상주하면서 그 넓은 장원을 총관리했으므로 실무에 기반한 확실한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일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우선 콥햄 경이 정원에 대한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이를 캔트와 의논했으며 캔트가 설계도를 그리면 브라운이 시공을 맡아 진행했다. 스토우 장원같은 대규모의 정원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완성되었으며 약 50여개의 크고 작은 정원들이 조성되었다. 브라운이 일을 시작할 무렵, 캔트에 의해 기본적인 틀은 이미 구축되어 있었다. 콥햄 경은 계속 새로운 스타파주 혹은 폴리를 고안하여 축조하고자 했으며 이에 따라 주변의 풍경도 구체화되어야 했다.
그리스 계곡 Grecian Valley
브라운의 실력과 성실함이 드러나자 콥햄 경은 차차 책임을 위임했으며 정원공사 뿐 아니라 기타 서기와 회계의 일도 떠맡게 되었다. 브라운은 스토우 정원에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 되어갔던 것이다. 이 즈음 그는 용기를 내어 스스로 개발한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콥햄 경의 인가를 받아 스토우 정원을 확장하여 북동쪽에 그리스 계곡Grecian Valley을 조성했다. 여기서 그의 풍경개념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후에 그는 여기서 개발한 원칙을 고수하며 다른 장원에서 계속 반복하여 도입한다.
그리스 계곡을 만들기 위해 브라운은 농경지의 흙을 약 2만 큐빅미터 정도 퍼내고 지형을 다듬었다. 계곡 전체는 초원으로 조성되었고 가장자리를 숲으로 둘렀으며 세 군데에 정점을 찍듯 건축물 세 개를 세웠다. 나중에 승리의 사원Temple of Concord and Victory 으로 개명된 그리스 사원, 목가적 시를 위한 사원, 그리고 콥햄 경 기념탑이었다. 건축물은 당시 스토우의 정원건축을 주로 설계했던 James Gibbs 의 작품이다.
이 시기에 브라운은 다른 장원의 정원조성을 위해 종종 차출되어 갔다. 적어도 아래의 세 정원은 브라운이 스토우 정원의 수석정원사로 근무하던 시절에 차출되어 가서 조성했다.
- Newnham Paddox, Warwickshire, 5. Earl of Denbigh
- Croome Court, Worcetershire, 6th. Earl of Coventry
- Warwick Castle, Warwickshire, Francis Lord Brooke, later First Earl of Warwick
1749 년 그의 고용주 콥햄 경이 세상을 떠난다. 브라운은 독립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또한 그의 아내가 셋 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어 출산 후 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스토우 정원에 계속 남아 정원을 관리하는 한 편, Croome Park과 Warwick Castle 등을 완성했다. 두 정원의 경우 건축까지 의뢰받았으며 브라운은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워윅 성이 완성되었을 때 랜셀롯 브라운은 홀로 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1751년 워릭 캐슬에 다녀 간 호레이스 월폴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워릭 성은 동화적이다; 내가 거기서 본 풍경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즐거웠다. 에이본Avon 강이 굽이치다가 캐스케이드가 되어 쏟아져 내리는 장면은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만든 것인데 제대로 한 것 같다. 그는 캔트와 사우스코트의 아이디어를 수용했다. 아이디어의 전파가 가져다 주는 효과가 이런 것이다. 브루크 경은 (브라운의 제안에 따라) 대담하게 자연적인 정원 양식을 수용했다.”
[호레이스 월폴, 지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토머스 하인드 Thomas Hinde 1986, p.38에 인용.]
3. 창업
1751 년 여름 햄머스미스라는 강가의 작은 마을에서 개업했으며 십삼 년 후, 1764년에 왕실정원총감으로 임명되기까지 수많은 작품을 완성한다. 왜 하필이면 그곳으로 이사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인근에 수목원 Kennedy & Lee와 건축업자 헨리 홀렌드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헨리 홀랜드와는 여러 번 일을 같이 했으며 나중에 사돈지간이 된다. 헨리 홀렌드의 동명의 아들이 브라운의 딸, 브리짓과 결혼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상당히 많은 작품이 탄생한다. 크룸 코트Croome Court, 워릭캐슬Warwick Castle, 커트링턴Kirtlington, 롱릿Longleat, 비치우드Beechwood, 모어파크Moor Park, 헤어우드Harewood, 벌리하우스Burghley House, 샤를코트Charlecote 등의 작품은 브라운을 유명하게 만든다. 그의 초기 작품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여겨지는 채츠워스 하우스Chatsworth House, 페트워스 하우스Petworth House 등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4. 왕실정원사
1764 년 조지 III세가 브라운을 왕실정원총감Royal Gardener으로 임명했다. 이 때 그의 명성은 최고조에 달했으며 쟁쟁한 귀족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미스터 브라운”으로 불렸다. 그 이전에 영국에서 최고의 명예와 부를 가졌던 노섬버랜드 공작을 위해 워릭 캐슬과 템스 강변의 사이언 하우스Syon House (현재 규카든 맞은 편에 위치) 등을 완성했는데 아마도 조지 III세가 사이언 하우스를 보고 결정을 내린 듯 하다. [Hinde, T., 1986. p.100]
브라운은 이제 평생 연봉 2000 파운드를 받게 되었다. 왕실정원총감이 되었다고 해서 개인사업을 접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까지 혼자 일했던 브라운은 드디어 직원 (John Spyer, Samuel Lapidge)들을 채용했고 거주지도 햄튼 코트로 옮겼다. 이 시기에 토트넘 파크Tottenham Park와 블래넘 팰러스Blenheim Palace 등의 대작외에도 수많은 작품이 완성되었다. 햄튼 코트자체에는 큰 변화를 주지 않았다. 브라운은 햄튼 코트의 정형식 정원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 명예로운 자리를 사양하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의 임무 중 하나인 과수원 관리에는 정성을 쏟았다. 오렌지하우스와 온실을 짓고 포도나무를 심었다. 브라운이 1769년에 심은 포도나무는 지금도 햄튼 고트 남아 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큰 포도나무’라고 한다. 이 시절에 그의 적이 되는 윌리엄 챔버스William Chambers를 만난다.
같은 시기에 햄튼 코트에서는 브라운이 큐 가든에선 윌리엄 챔버스가 각각 책임을 맡고 있었으며 리치몬트 파크 를 개조할 때는 함께 일해야 했다. 아마도 이때부터 갈등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1769년 로버트 클라이브 남작 1. Baron Clive 이 랜셀롯 브라운과 윌리엄 챔버스에게 각각 새 저택의 디자인을 의뢰했는데 브라운의 디자인이 선정되었다. 윌리엄 챔버스는 건축가로서 정원사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 때부터 챔버스의 본격적인 ‘브라운 공격전’이 시작되었다. 둘의 전쟁에서 랜셀롯 브라운은 벽돌과 몰타르로 싸웠고 챔버스는 팬과 잉크로 싸웠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Hinde, T., 1986, p.145]
클레어몬트 하우스의 용역을 받은 뒤 브라운은 결정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용역을 거절할 것인가 아니면 파트너를 구할 것인가. 브라운은 후자의 경우를 택하고 젊은 건축가 헨리 홀랜드Henry Holland와 동업관계를 맺는다. (1771) 헨리 홀랜드의 아버지는 동명의 건축업자로서 브라운을 위해 이미 여러번 공사를 한 경험이 있었다. (Bowood House, Ashridge). 브라운은 아들 홀랜드의 재능을 알아 보았으며 클레어몬트 하우스의 디자인은 브라운이 했지만 인테리어 등은 홀랜드에게 맡겼다. 몇 년 후 홀랜드는 브라운의 맏딸 브리짓과 혼인한다. 헨리 홀랜드는 브라운의 사후에 건축가로서의 브라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태 이런 건축가를 본 적이 없다. 그는 시대가 필요로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고, 건물을 앉히기 위해 레벨을 잡는 것부터 안락한 방의 설계, 접근성, 드레인까지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조화롭게 풀어나갔다. 그는 작업 중에 고용인들과 단 한 번의 갈등도 겪은 적이 없으며 그들을 늘 만족시켰다. 마지막 순간까지 고용인들은 브라운에게 만족했다.” [Hinde, T. 1986, p.146]
5. 브라운과 챔버스
윌리엄 챔버스가 브라운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챔버스가 1772년 동양정원에 대한 고찰이란 책을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이 책에서 그는 우선 천편일률적인 브라운식 영국 풍경정원을 비판하고 중국 정원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상세히 설명한다. 챔버스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우선 브라운을 공격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이와 관련하여 새로운 정원 개념, 자연이 아닌 예술에 의해 정의되는 정원을 새롭게 도입하기 위해서였다. 챔버스는 자신의 개념을 큐 가든에서 도입하지만 그건 예술에 의해 정의되는 새로운 정원이라기 보다는 디즈니랜드에 머물고 말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팬과 잉크로 정원을 짓는 사람이라고 빈정거렸다. 이로 인해 순수한 풍경정원의 기본 개념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새삼 등장했고 특히 큐 가든을 통해 왕실에 풍경화적 정원을 도입한 것에 대해 큰 비판이 쏟아졌다. 본래 왕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의지를 표현하던 정원이었다. 그 이념이 왕실에 흡수되었으니 반발이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로 인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챔버스가 후대의 조경에 미친 영향은 상당히 크다. 챔버스의 디즈니랜드 적 풍경정원이 유럽, 특히 프랑스로 도입되면서 중국풍의 영국정원 Jardin-anglo-chinois이라는 기이한 양식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브라운과 챔버스는 몇 년 후 밀턴 에비Milton Abbey에서 또 다시 마주친다. 챔버스가 밀턴 에비에 나타났을 때 브라운은 이미 거의 십 년째 광범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이었다. 파크를 짓기 위해 밀턴 에비의 소유주였던 조셉 데이머 남작은 저택 인근의 마을을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브라운에게 마을 설계를 의뢰했다. 이 마을은 밀턴 아바스라고 불리며 지금도 존재한다. 브라운이 마을 조성에 한창 열중해 있을 때 데이머 남작은 저택을 고딕 양식으로 개조하고자 챔버스에게 이를 의뢰했다. 용역비 문제로 남작과 챔버스 사이에 지속적인 불화가 있었고 챔버스는 결국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돌아간다. 데이머 남작은 상당히 소문난 못 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남작과 십여년간 갈등없이 일을 추진할 수 있던 것은 브라운이 대단한 외교술과 인내심의 소유자라는 증거라고 보고 있다.
6. 브라운의 마지막 여정
1760년대는 브라운의 삶에서 가장 분주했으나 가장 수확이 컸던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왕실정원총감이 되고 1768년에는 펜스텐턴 장원Manor of Fenstanton의 주인이 된다. 캠브리지셔에 위치하고 있는 펜스텐턴 장원은 노스햄턴 백작의 소유지 중 하나였다. 이를 브라운이 정식으로 구입한 것이다. 1770년대에도 브라운의 일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 시기에 챔버스로부터 전면 공격이 가해졌지만 그로 인해 고객이 끊기지는 않았다. 크룸 에비Croome Abbey, 헤어우드 하우스Harewood House 등 주옥 같은 작품들이 탄생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웨일즈에 있는 윈스테이 파크Wynnstay Park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천식으로 고생했던 랜셀롯 브라운은 1783년 만 68세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7. 브라운에 대한 당대의 평가
윌리엄 챔버스에 동조하는 반대파도 물론 있었지만 당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두 명의 평론가가 브라운의 풍경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1770년 최초의 정통적 정원평론가로 알려진 토머스 웨이틀리Thomas Whatley가 브라운의 정원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며 그와 같은 정원을 만드는 기법까지 안내했다. 특히 의미깊은 것은 냉소적이고 독설적이며 윌리엄 캔트 주의자였던 호레이스 월폴이 브라운을 지지하는 쪽에 섰다는 사실이다. 1780년에 출간된 그의 에세집 “On modern Gardening”에서 월폴은 브라운을 윌리엄 캔트의 후계자로서 자격이 충분하다고 평했다. 월폴은 그 자신이 백작의 신분이었으므로 브라운의 고객층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고, 서신을 통해 늘 브라운의 작품에 대한 리뷰를 간략히 전했다.
브라운의 사망 소식을 들은 월폴은 레이디 오소리Lady Ossory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 숲의 요정들은 검은 장갑을 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요정들의 시아버지, 마담 네이처의 두 번째 남편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Walpole, Horace (1861). “The Letters of Horace Walpole: Earl of Orford”. Bohn’s English Gentleman’s Library (Covent Garden; London: Bradbury and Evans; Henry G. Bohn) 8: 331. Retrieved 13 March 2012.]
참고자료
- Walpole, H. (1770/2004): On Modern Gardening: Pallas Editions.
- Buttlar, A. von (1989): Der Landschaftsgarten: Gartenkunst des Klassizismus und der Romantik: DuMont.
- Hinde, T. (1986): Capability Brown: The Story of a Master Gardener: Hutchinson.
- Mayer, L. (2011): Capability Brown and the English Landscape Garden: Shire.
- Goode, P.; Jellicoe, G.; Jellicoe, S.; Lancaster, M. (1991): The Oxford Companion to Gardens: Oxford University Press.
- Hunt, J. D.; Willis, P. (1988): The Genius of the Place: The English Landscape Garden, 1620-1820: MIT Press.
© 100장면으로 읽는 서양 조경사/미스터 브라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