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라미스는 기원전 9세기 아시리아 제국을 호령했던 여왕이었다.
본래는 젊은 장수의 아내였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총명했다. 그리고 야심이 컸다. 남편은 늘 전장에서 살았다. 이번엔 동쪽의 박트리아를 공략하기 위해 대군이 떠났다. 그런데 박트리아 군대는 높은 산에 단단한 요새를 쌓고 들어 앉아 방어만 했다. 겹겹이 두른 성벽이 어찌나 높고 든든한 지 벌써 몇 달 째 포위하고 매일 공격했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높은 탑에서 내려다 보기 때문에 몰래 접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집적거리는 뜨뜻미지근한 전투가 지속되자 젊은 장수는 아름다운 아내가 그리웠다. 사람을 보내 아내를 오라고 했다. 아내 세미라미스가 전장에 나타났다. 그리고 전장의 형세를 유심히 살피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게 승리할 수 있는 묘안이 하나 있는데 군사 몇 명만 내 주세요.” 아내의 총명함을 아는 젊은 장수는 군사를 몇 명 내 주었다. 세미라미스가 좁은 협곡으로 내려가 산을 빙 돌아 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모두들 아시리아 군대가 진을 벌리고 있는 앞쪽 들판만 바라보고 있었지 뒤쪽의 방비는 허술했다. 세미라미스는 군사들과 함께 높은 탑위로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탑을 지키며 졸고 있던 파수병들을 기습하여 제거하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미리 말을 맞추어 두었던 남편이 군대를 이끌고 공격했다. 앞뒤 양면 공격을 받게 되자 적들이 당황했다. 우왕좌왕 혼란이 왔고 아시리아 군대는 대승을 거두어 성을 접수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이 세미라미스를 불러 공을 치하했다. 그러다가 그녀의 빼어난 미모를 보고 한 눈에 반했다. 젊은 장수를 불렀다. 네 아내를 내게 다오~ 젊은 장수는 도리질을 했다. 안 됩니다! 그럼 그 대신 내 딸을 네게 줄게. 그래도 싫다고 했다. 회유가 안 되자 더욱 탐이났다. 그래서 이번엔 압력을 넣었다. 네 두 눈을 멀게 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젊은 장수는 넋이 빠져 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을 했다. 남편이 죽자 세미라미스는 왕비가 되었다. 이 왕이 아시리아의 전설적인 니노왕이다. 영토를 확장하여 아시리아를 대제국으로 이끈 왕. 세미라미스를 얻어 이제 행복할 줄 알았다. 둘 사이에 왕자도 태어났다. 니니아라 불렀다.
세미라미스에게 정부가 생겼다. 아수르라는 잘 생긴 청년이었다. 세미라미스는 아수르와 짜고 남편 니노 왕을 독살했다. 그것을 눈치챈 충실한 신하가 어린 니니아 왕자를 데리고 멀리 도망갔다. 세미라미스는 여왕으로 등극했다. 그리고 남편보다 더 크게 영토를 확장하고 바빌론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건설하고 궁전을 짓고 거기에 공중정원을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 니니아 왕자가 청년이 되어 바빌론으로 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몰랐다. 세미라미스는 니니아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피가 끌리는 것을 남녀간의 애정으로 착각했다. 니니아와 혼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니니아는 인도의 젊은 공주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도 세미라미스 여왕이 공식적으로 선포하자 여태 니니아를 기른 신하가 출생의 비밀을 밝혔다. 세미라미스는 기절초풍하여 아들에게 나를 죽여달라고 청하고 역시 넋이 나간 니니아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 어머니의 정부 아수르에게 복수하겠다고 칼을 뻬 마구 휘둘렀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어머니 세미라미스를 찔렀다. 세미라미스는 죽고 니니아는 왕이 되었다.
세미라미스와 공중정원
세미라미스 여왕의 끔찍한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가 있다.
공중정원의 진실게임이라는 제목을 잡아 놓고 원고를 준비하고 있던 중에 바빌론 공중정원이 실은 세미라미스라는 여왕이 만들었다는 설에 접하게 되었다.
여태 네부카드네자르 왕이 페르시아 산악지대 출신인 왕비를 위해 산처럼 높다랗게 지은 것이 공중정원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이의를 단 것이다. <그게 아니다. 실은 세미라미스라는 여걸이 있었는데 그이가 지은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여걸이라는 얘기에 귀가 솔깃했다. 그래? 그 시절, 그 동네에 여왕이 있었다고? 우선 그것부터가 신기했다. 그래서 세미라미스 여왕을 검색해 보았더니 이태리 오리엔트 학자 조반니 페티나토Giovanni Pettinato교수가 집필한 일대기가 있었다(왼쪽 그림). 전기가 있는 것을 보니 세미라미스가 가상의 인물 또는 전설 속의 인물은 아닌 모양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전설적 인물이기도 하고 실존 인물이기도 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실인즉, 세미라미스 스토리가 너무 흥미롭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수많은 사가, 작가 들이 다투어 다뤘고 후세에 와서는 볼테르가 희곡을 쓰고 로시니가 오페라를 만들었다.
대체 어떤 여인, 어떤 스토리였기에 그 많은 작가들을 열광하게 했을까. 심히 궁금했다. 그래서 일대기를 읽어보니 클레오파트라는 저리가라였다. 다만 아득하게 먼 곳, 아시리아 (지금의 시리아 지역)의 여왕이었기에 클레오파트라에 비해 덜 알려진 것이 아니었을까. 홀로 짐작해 본다.
전설 속의 인물들이 늘 그러하듯, 절세의 미모에 뛰어난 전략가였고, 잔인한 전쟁영웅이었으며, 도시건축의 귀재여서 바빌론이라는 최고로 아름다운 도시를 건설했고 그 과정에서 공중정원을 지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공중정원을 지은 것으로 말미암아 극과 오페라 소재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생애에 뭔가 극적인, 특히 비극적인 사연이 있어야 극이 된다. 알고보니 여성판 오이디푸스가 아닌가 싶은 사연이 있었다. 물론 그리스적 상상력이 만들어 낸 이야기 일 터. 이미 고대 그리스에 세미라미스 여왕에 대한 소설이 나와 엄청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크게 보태 저런 비극을 만들어 낸 것이다.
진짜 역사속의세미라미스여왕은 남편이 병으로 죽자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지그라트라는 피라미드형 묘를 지어주었다. 이후 여왕이 되어 42년간 통치했고 전쟁을 치렀고 비빌론 건설에 공을 들였고 나중에 아들에게 왕좌를 물려주었다.
그런데 세미라미스가 공중 정원을 지은 것이 맞는지?
세미라미스가 공중 정원을 지었다는 얘기는 신빙성이 있다. 이쯤해서 공중정원에 관한 것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공중정원은 고유명사가 아니다. 베르사이유 정원이나 상수시처럼 유일무이한 정원 이름이 아니라 보통명사로 보아야 한다. 즉, 아시리아 특유의 정원양식이었다. 프랑스 정원이 평면기하학적이고 이태리 정원이 노단식이었다면 고대 아시리아에서는 즐겨 높은 성벽 위에 정원을 만들었고 이를 사람들이 공중 정원이라 불렀다. 그래서 바빌론에서도 나타나고, 니니베에서도 나타나고 이 왕이 지었느니 저 여왕이 지었느니 설이 분분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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